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고종, 군밤의 왕) (문단 편집) == 행정구역 == 1879년 국제를 제정하면서 오백 년을 거치며 경계가 난삽해진 팔도의 부·군·현을 크게 정리하였고, 사람 많거나 땅 넓은 도는 둘로 쪼개어 각각 관찰사를 두었다. 수령은 여전히 중앙에서 임명하지만, 김홍집 내각에서 수령에게 참견할 권한을 재차 확인받은 군현 각지의 향회에서 '작은 참의원' 모양새를 갖추어 민심을 대변한다. * 도(道) * 함경도 개정된 조러수호조약에 따라 러시아인은 함경도 땅에서 통상과 이동, 그리고 거주의 자유를 갖는다. 그래서 시베리아 곳곳의 정치범 유형수들 몇몇이 연해주를 경유하여 함경도로 도주하기도 한다. * 황해도 동철에서 융통해온 자금으로 지은 철정국(제철소)이 황해도 재령에 있다. * 전라북도 1902년 기준으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952|이승우]]가 관찰사로 재직 중이다. * 부(府) * [[한성부]] 조선의 수도. 개항 이후 날로 성장하여 김옥균이 아주의 가운데 도시라고 자부할 정도로 번영한 대도시로 거듭났다. 기존 5부에 마포부와 교남부가 합해져 7부가 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한 인구가 일거리 찾아 한양으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치안이 나빠지고 있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 정동 한성부 하위 행정구역. 원 역사대로 외국 공사관이 밀집된 곳이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차린 정동구락부가 있다. * 작은 파리(Le Petit Paris) 프랑스 신정부의 박해를 피해 조선으로 망명한 옛 [[파리 코뮌]] 구성원들이 모여 살았던 동네. 한성부 서부에 위치한 선혜청 창고 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온다. 제물포 오갈 일이 많은 망명객들이 [[숭례문]] 근처 집값 헐한 곳을 찾다 보니 이쪽에 몰리게 됐다. 카페 겸 술집인 삼월 카페(Cafe de Mars), 일명 삼월당이 있다. * 이태동(異胎洞) 옛 선혜청 부근을 속되게 이르는 말. 작은 파리가 코뮌 망명객들이 귀국한 뒤에도 한몫 챙기러 넘어온 국외인들이 그 빈자리를 채움으로써 동을 칭할 만큼 넓어져 '이태동'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름난 심양의 외국인 거리만 하겠냐만 제법 이국적인 곳이다. 이태동에서 태어난 혼혈들은 자신을 조선인이라고 생각하므로 이태동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 [[밤섬]] 원자폭탄을 연구한 격치물성청 부속 연구소가 있는 곳이다. 본청에서 쉽게 오갈 수 있으면서도 인마 오가는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곳이라서 부지로 낙점됐다. * 인천부 조선 최초의 개항지. 개항 이후 대외 무역이 활성화되고 각종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한양, 평양, 개성, 동래와 함께 조선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도시가 되었다. 늘어나는 교역에 비례하여 인천부에 자리를 잡은 외국인들도 늘었다. 인천항에 [[파리외방전교회]]가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세운 경일학당이 존재하며, 그 옆 고을에 큼직한 기기창과 인천목을 뽑아내는 관립 방적공장이 있다. 노벨이 세운 화약 공장 역시 인천부에 있다. 이렇게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는 만큼 고공들의 수도 많아 만민공산당의 텃밭이다. * [[경흥부]] 인천에 이어 원산, 동래와 함께 개항지로 선택됐다. 개항 초기에 연해주에 양곡을 넘기고 모피를 받아왔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 러시아인들이 적어 별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8년 정도 지나자 러시아 군인들이 근무 끝나고서 두만강 건너와 '경흥개시'에서 술 한 잔 걸치고 가는 것이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 조러수호조약이 개정되어 국경이 개방된 이후로는 두만강변 초소와 초소 사이가 논밭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 원산부 인천에 이어 경흥, 동래와 함께 개항지로 선택됐다. 이후 강원도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로 성장하여 덕원부에서 분리되었다. 일본을 오가는 선인들이 종종 배를 대며, 포경하는 미국 어민들도 가끔 드나든다. 시베리아에서 탈출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저자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은신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본 영사관이 있다. * 동래부 인천에 이어 경흥, 원산과 함께 개항지로 선택됐다. 개항 이후 일본 오가는 사람과 배가 늘어나면서 동래부 본래 읍내보다 부산항이 더 커졌다. 통제수사에서 가장 신경 써서 방비하는 곳이다. 일본 영사관이 있다. * [[평양부]] 예로부터 조선에서 내로라 하는 대읍이었는데 개항 이후로는 [[한양]], 인천, 개성, 동래에 치여 다섯째로 떨어졌다. 경의선이 심양, 연경까지 이어져 옛 성세를 어느 정도 되찾기는 했지만 이미 적잖은 [[평양부|평양]]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성과 인천 일대로 유출됐다. 게다가 기전[* [[은나라]]가 멸망하고 조선에 온 [[기자(중국)|기자]]가 [[평양부|평양]]에 설치했다고 전해지는 정전.] 발굴에 실패하여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기도 하였다. 그래서 1904년 평양 아주대회에서 부민 1천명이 개막식에서 1년 동안 연습한 [[매스게임]]을 선보였을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다. * 수원부 원 역사와 달리 군으로 강등되지 않고 2013년까지도 부 지위를 유지했다. * 군(郡) * 운산군 운산 금광이 있는 곳. 광무총국 현장 사무실이 있다. 운산에서는 개도 1원짜리 종잇돈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 [[울도군]] 개항 후 어쩌면 [[울릉도]]가 중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여, 군을 설치하고 백성을 여럿 보냈다. * 양평군 양근와 지평을 통합하여 군을 설치했다. 화서학원이 있는 곳이다. * 김제군 나날이 개간하여 김제 한 곳의 소출이 선왕대 팔도의 소출에 맞먹는다는 농이 있을 정도이다. * [[영주시|순풍군]] 순흥부와 인접한 풍기, 그리고 옆 영천(오늘날 영주시의 일부)의 일부를 합쳐서 만든 곳. 순흥과 풍기 두 고을 모두 유풍이 강한 곳이라 자유당의 텃밭이다. 숙종에게 단종 복위 운동을 인정받은 사실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 [[함흥부|함흥군]] 용흥지지(龍興之地)요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지만 배 드나들기로는 원산이 훨씬 좋고, 함흥평야 벗어나면 온통 험산준령뿐이라 썩 흥성하지 못하다가 그 험산 덕분에 조선 최초의 비료공장이 세워졌다. * 온양군 원 역사와 달리 아산시에 편입되지 않고 2013년까지도 독립된 군으로 존재한다. 명소로 사실상 박물관이 된 온양행궁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